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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9. 25. 06:08

송 아저씨와 문신 by 92005. 9. 25. 06:08

경비원 송 아저씨는 왕십리에서 한가닥했던 주먹 출신이다. 그의 팔에는 과거를 기억하듯 문신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무늬를 하고 있지만, 그의 과거와 연관지어 "문신" 이라는 별명은 적절해 보인다.

한때 많은 젊은이를 수하에 둔, 큰 조직을 거느렸던 아저씨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일이 많은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짱가처럼 회사 주변 일들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지금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발음도 부정확해서 송 아저씨의 문장을 끝까지 듣는 것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젊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송 아저씨가 나타나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송 아저씨는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전에 문장을 마치려고 말이 빨라지지만 그 문장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송 아저씨, 서운한 내색은 하지 않는다.

숙직을 서던 날 밤, 숙직실이 답답하여 경비실 앞 로비에 앉았다. 맥주 한잔을 권했지만, 송 아저씨는 술 끊은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예전 성질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마시지 않기로 했다고. 야식을 먹으며 시작된 송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에 늦여름 숙직실의 밤이 깊었다. 사모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여쭤본 것 외에 나는 그저 장단만 맞춰 주었을 뿐이다.

액션영화가 어울릴 것 같은 주먹 세계의 이야기가, 의리 깊은 사나이가 등장하는 신파극이,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가족 간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건달 세계로 입문하게 된 이야기, 실미도를 떠올리게 하는 북파간첩 활동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 검찰과 정치인들과 건달이 서로 얽혀있는 이야기, 건달세계를 떠나게 된 과정의 이야기, 버스회사와 택시 회사 이야기, 시골에 내려가 가족들의 부채를 주먹으로 해결한 이야기 등등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조성모풍의 뮤직비디오를 연상할 만큼 절절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내가 어수룩해 보이고 그러지? 그래도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누가 뭐라 그래도 내 뜻대로 하는 사람이야. 나는 아닌거 맞다고 하는 사람이 젤 싫어. 그런 경우는 내가 못 참지. 남자는, 자기 소신이 있어야 되. 소신대로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하고." 이런 말을 할 때, 아저씨의 크고 두툼한 손은 단단한 주먹으로 꽉 쥐어졌고 눈빛은 젊은이의 것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송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몇 부분이 되풀이되기도 하고, 졸음 속에 묻혀 사라지기도 했다. 아저씨는 한편한편을 이야기 하면서 내가 들었던 부분 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기억 속에 멀리 잊혀져있다 떠오른 사람들을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 속의 그들이 나는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아저씨의 어눌한 표정과 끝이 흐린 말투 때문에 그의 인생이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단지 잔소리가 많은 아저씨로 분류되기에는 그가 겪어낸 인생이 너무 무겁다. 언뜻 언뜻 이야기 속에 드러난 송 아저씨의 눈빛은 평소의 것과 분명 달랐다. 영화처럼 멋진 결말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바랬다. 송 아저씨는 이야기의 끝에 남자로써 멋있게 살아갈 좋은 충고를 들려주었지만, 충고가 이야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양이 많아지는 바람에, 뭔가 있기는 한데 뭐가 뭔지 모르는 그의 문신처럼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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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