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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2. 21:11

칼럼: 태그, 꼬리표의 느슨함 by 92012. 11. 12. 21:11

태그, 꼬리표의 느슨함

컴퓨터가 바꾼 생각 체계를 인간의 방식으로



여행을 다녀 와 사진 파일을 정리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사진 한 장 한 장 마다 사진을 찍을 당시의 이야기가 떠 오르기 때문이다. 주어진 사진을 보고 감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여행 사진 중에서 내가 나온 사진만 골라내거나 풍경만 골라 내는 경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하는 사진을 어떻게 처리 할지 선택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이럴 때 태그를 사용하면 고민을 덜 수 있다. 태그는 사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방대한 데이터 중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조합하고, 구성하는데에 사용된다. 태그가 대단히 새로운 기술도 아니다. 가게에서 옷을 살 때 사이즈와 가격이 써있는 꼬리표가 바로 태그다. 옷 가게에서는 “택” 이라고 짧게 부르고 컴퓨터에서는 “태그”라고 풀어서 말하는 차이밖에 없다. 그 상품을 설명하는, 다른 상품과 구분하는 표시가 바로 태그다.



사진을 나누는 방식


함께 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에게 내가 찍은 사진을 보내 주려다 문득 이 많은 사진들이 모두에게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 취향으로 필요하지 않은 사진이야 각자 지우면 그만이지만, 용량이 너무 커서 전송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 사진을 전달할까, 어떻게 용량을 줄일까 고민하다 중고등학교 때 소풍 사진 생각이 났다.


동네 마다 사진관이 있었다. 소풍을 다녀와 사진을 맡기면 사진관 아저씨는 사람 수 대로 사진을 뽑거나 무조건 1장 뽑는 옵션을 물었다. 사람 수 대로 뽑는 옵션을 선택하면 5명이 찍힌 사진은 5장이 나왔다. 자신이 들어있는 사진을 다 받아 볼 수 있으니 나름 불만이 없는 선택이었지만 정작 사진에 찍힌 당사자가 사진을 원하지 않으면 사진을 뽑아 온 사람은 사진값 처리로 문제가 생겼다.


무조건 1장 옵션으로 일단 샘플을 뽑아 자신의 사진이 필요한 사람의 신청만 받아 다시 출력하기도 했다. 보통 수학여행이나 MT를 다녀와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겹치기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이었지만 한번 출력에 하루 이틀이 걸리는 시절이라 손에 사진을 받아 볼 때까지 며칠 걸린다는게 단점이었다. 필름도 비싸고 사진 인화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필름 시대의 사진은 그렇게 우리 손에 들어왔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편이 나온 사진은 이메일로 보내주거나 USB 디스크로 복사해 전달한다. 보통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일이 꼬인다. 가령, 길동이는 풍경 사진 보다 자신이 나온 사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길동이에게 길동이가 나온 사진을 모아서 보내 주려면 할 때 그 사진들만 따로 모아 폴더를 만들고 파일을 복사해 넣고 압축해서 보낸다. 길동이 같은 사람이 10명이면 10개의 폴더에 사진이 쌓인다. 나중에 용량을 줄이려고 보면 같은 사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어느것을 지워야 할지 혼란스럽다.


신혼여행 같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여행을 다녀와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보여줄 때 닭살 돋는 개인 사진들은 빼고 여행지의 풍경이나 음식 사진들만 보여주고자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을 대비해 미리 사진을 분류 해 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딱 한 군데 여행지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간 다닌 출장지의 음식 사진들을 보고 싶을 때에도 한 번에 목록을 만들어 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사진을 구분해 보는 일이 없다면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라면 어떨까. “사진” 이라는 단어 대신 “아이디어” 혹은 “메모”, “약속”, “레시피” 같은 것으로 생각해 보면 생활의 큰 변화가 생긴다. 태그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사진을 정리하는 기능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습관을, 행동 패턴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태그는 게으른 정리 방식이다


일기를 꾸준하게 써 온 사람이라도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 바로 바로 대답 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그 내용을 찾기 위해 일기장을 다 뒤져 보기도 힘들고, 뒤져서 찾아 낸다고 하더라도 혹시 또 누락된 내용이 있을 수 있다. 태그를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컴퓨터를 사용해 기록한다는 것은 지난 날 생각했던 반짝이는 아이디어 혹은 추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는데 효과적이다. 지금은 컴퓨터를 사용해 기록한다는 것이 새롭거나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므로 현재 상태에서 태그를 사용한다는 것만 추가하면 된다. 


태그를 사용한다는 것은 정리를 좀 더 느슨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사진의 예를 들어 보자. 여행 사진이 100장 정도 있을 때 그 사진들을 풍경, 사물, 음식, 인물, 정보(간판이나 티켓등을 찍은 사진)으로 구분하기 위해 폴더를 만들고 따로 구분하여 넣어 놓는다. 인물 폴더에는 각각의 인물별로 폴더를 만들어 분류해 넣는다. 그런 폴더의 구조를 그려보면 마치 회사의 조직도 같은 그림이 된다.


이 분류 방법은 체계적이고 완벽해 보이지만 허술한 구석도 많다. 2명이 찍은 사진은 복사를 해서 각 개인의 이름이 쓰여있는 폴더에 넣어야 하고, 2명이 여행지 간판 앞에서 향토 음식을 들고 찍은 사진이라면 더 많은 복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폴더를 감상할 때, “아, 이 사진 다음에 뭘 찍었는데..” 할 때 그 다음 사진을 보기가 어렵다. 시간 순서로 배치한 사진들을 보려면 전체 사진을 다시 배치해야하기 때문이다. 마치 회사의 의사결정 처럼 느리고, 융퉁성이 없고, 합리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합리적이지 않고, 그리고 무엇 보다도 재미가 없다.


태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100장의 사진을 한 폴더에 그대로 두고 각 사진에 태그를 단다. 풍경, 사물, 음식, 인물, 정보 같은 태그도 달고 사람 이름 태그도 단다. 사진 한 장에 달 수 있는 태그는 여러 개 일 수 있다. 태그는 파일명이 아니다. 파일명은 폴더 내에서 유일한 것이지만 태그는 같은 태그가 여러 곳에 사용될 수 있다. 사진 한 장에 100개의 태그가 달려도 무방하다. 꼬리표가 덕지덕지 붙은 사진일 수록 다양한 검색에 노출된다. 태그가 붙어 있는 사진은 각각의 태그를 검색할 때마다 태그에 해당하는 사진 목록이 나타날 것이다.



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검색


빙글 빙글 돌다가 2명~ 하면 2명 모이고 5명 하면 5명이 뭉치는 게임처럼 태그를 사용하는 검색도 비슷하다. 풍경 사진 모여~ 하면 풍경 이란 태그가 붙은 사진들만 나타나고 길동이 사진 모여~ 하면 길동이 사진만 나타난다. 책상 위에 100장의 인화된 실제 사진이 널려있는 상황도 비슷하다. 빨간색은 풍경, 파란색은 음식, 노란색은 인물이라는 방식으로 스티커를 붙이 놓으면 스티커 색깔로 사진들을 분류하기가 편하다. 어떤 사진은 빨강, 파랑, 노랑 스티커가 다 붙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빨간색끼리 모아서 한 폴더에 넣는게 아니라 한 폴더에 빨강 파랑 노랑 스티거 사진을 다 모아 놓고 그 때 그때 빨강만, 파랑만, 노랑만 추려서 보는 방식이 태그 방식이다.


태그는 폴더를 사용해 사진을 물리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 폴더 내에 몇가지 구분 표시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친구가 사진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막연한 말들로 친구의 사진을 찾게 된다. 지난 여름에, 춘천에서, 맛있게 먹었던... 뭐 그런 내용일 것이다. 그런 정도를 말하면 친구가 그게 뭐였지 하면서 그 당시 기억을 되살리며 어떤 사진들을 찾아내고 여러장을 보여준다. 나는 그 중에서 바로 이거야! 하고 한 장을 골라내거나 그 여러장을 모두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태그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과 비슷하다. 작년, 여름, 춘천, 음식, 맛집... 그런 검색어를 가지고 사진을 검색하면 친구가 찾아 주듯 해당 태그를 가지고 있는 사진 몇 장이 나타나고 그 중에 몇 장이 내가 원하는 사진일 것이다. 정확한 이름을 몰라도 사용할 수 있다. 대충 알고있는 몇 가지 혹은 정확하지 않은 몇가지 증거들을 제시하며 근사치를 얻는 방식이다. 그 근사치 목록에서 다시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내는, 실제 생활과 닮은 방식이다.


급하게 생각난 아이디어나, 갑작스레 하게 된 약속, 친구에게 배워 온 요리법 같은 것을 미리 정해진 분류 기준에 맞춰 구분해 넣으려고 하면 아이디어 그 자체보다 분류하는 일이 복잡해 분류작업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아이디어를 분류하지 않고 태그만 달아 한군데 모아 놓으면 아이디어 자체에 좀 더 집중 할 수 있다. 그것이 태그의 장점이다.



컴퓨터가 나에게 입력을 시키는가,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가


컴퓨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지루하겠지만, 처음 컴퓨터를 접하던 시절의 컴퓨터는 전문 공학자들이 사용하는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었다. 기업에서 사용하는 비싼 장비로, 학교에서 전공하는 사람들이 배우는 장비에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러면서도 컴퓨터는 그것을 사용하가 위해 사람이 뭔가를 배워야 했다. 학원에 등록해 몇 개월을 공부해야 했고, 자격증을 갖춰야 하는 전문적인 분야에 속했다. 그래서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은 뭔가 뿌듯한 자부심이 있었고 컴퓨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많은 것을 저장하고 다시 찾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자료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는 일도 내가 해야하고, 다시 찾기 위해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편하지고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점점 컴퓨터가 일하기 위해 내가 수고하는 형태가 되어갔고 그것이 당연해졌다. 더 편해지려고 할 수록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수고스러워야 하는 구조에서 불편함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상황이랄까.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일을 컴퓨터가 하지 못해도 그것을 컴퓨터의 오류라고 생각하기 보다 나의 질문을 수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 컴퓨터에 태그를 사용하는 것 하나를 추가하면, 내가 정확한 이름을 지어줄 필요도 없고 정확한 분류 위치에 저장하지 않아도 된다. IMG_3579.JPG 라는 이름을 몰라도 사진을 찾을 수 있고 내가 그 사진이 실제로 어떤 복잡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알 필요도 없다. 아이디어를 저장하기 위해 파일 형식은 어때야 하는지, 그 파일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어떤 체계로 운영될 것인지도 결정할 필요가 없다. 기술적으로는 크게 바뀌는 것도 없는데 태그를 사용하는 것과 아닌것의 차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주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주인으로서, 덜 공부하고도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도구로써의 컴퓨터가 가능하게 된다.


태그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검색이 가능한 영역에 텍스트 몇 줄을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태그 덕분에 사람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태그가 없을 땐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내가 맞춰야 했지만 태그가 있을 땐 내가 주인이 되어 컴퓨터가 바쁘게 움직이며 자료를 준비해 주는 것이다. 내가 정확한 이름을 몰라도 미안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컴퓨터를 주인으로서 다루는 그 변화의 시작이 태그다.




:: 월간 개벽신문 15호 [2012년 11월]

:: http://www.dongha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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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10. 21. 14:16

칼럼: 비효율의 가치, 앰프의 세계 by 92012. 10. 21. 14:16

비효율의 가치, 앰프의 세계


100원을 내고 100원 짜리 상품을 가져오는 것이 거래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에너지의 세계에서는 100의 재료를 가지고 100의 효용성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100을 내고 70 정도만 되어도 고효율이라고 칭찬을 하는 것이 에너지 효율의 세계다. 그런데 70은 커녕 10도 되지 않는 결과를 칭찬하는 이상한 세계가 있다. 폭포수 처럼 쏟아지는 에너지 속에서 물 한 컵 정도의 결과를 내는 오디오 앰프가 그렇다. 고효율 저비용을 높은 가치로 인정하는 시대에 굳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세계라니, 그 사연이 궁금하다.




앰프는 증폭을 한다.


앰프는 "앰플리파이어(Amplifier)"라는 장비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앰플리파이어는 앰플리튜드(amplitude)를 증가시키는 장비인데, 앰플리튜드는 진폭을 뜻한다. 그래서 앰프를 우리말로 하면, 진폭을 증가시키는 장비 즉, 증폭기라고 한다.


amplifier :

an electronic device for increasing the amplitude of electrical signals, used chiefly in sound reproduction.

- Oxford English Dic.


진폭은 진동의 폭을 말하는데, 진동의 폭은 물체가 진동하는 동안 움직인 거리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시계 추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자.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것이 진동이고 시계 추가 움직이는 왼쪽 끝과 오른쪽 끝, 그 사이가 진폭이다. 다이어트 할 때 늘었다 줄었다 하는 몸무계 처럼 한 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이 진동이고 날씬 했을 때의 몸무게와 무거울 때의 몸무게 차이가 진폭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아이의 성적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점수가 진동이고 점수와 점수 사이의 차가 진폭이다. 앰프는 바로 이 진폭을 더 크게 만드는 장치다. 말하자면 요요현상을 더 심화시키고 성적의 부침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라던 바는 아니겠지만, 진폭을 증가 시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증폭이라 하면 10원으로 100원 정도는 만들어 내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요요현상이라니 실망감이 크다. 앰프 이론을 들여다 보면 상상한대로의 증폭을 못할 것도 없다. 앰프는 1mV (1/1000) 전기를 넣어 1V를 만들어 내니, 거기에 비하면 10원이 100원이 되는 것 쯤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증폭의 윈리



그림1. 시계 추와 진폭의 관계


그림에서 시계 추의 길이를 10cm, 추가 움직이는 각도를 30도라고 하자. A와 B 사이를 연결하는 선이 진폭이고 길이는 약 6cm 정도 된다. 이제 이 추의 길이를 20cm 로 연장해 똑 같은 각도로 움직일 때, 그 끝을 각각 C와 D라고 하고 C와 D 사이를 측정하면 약 13cm 정도가 된다. 같은 각도로 움직이는 추의 길이를 바꾸면 진폭이 달라지는 것이다.


추의 길이를 길게해서 진폭이 커지면 이것이 바로 앰프다. 진폭을 키우는 것이 앰프라고 했으니 추의 길이를 길게 만들어 진폭을 키우는 것도 앰프라고 할 수 있다. 단, 사전에 정의하고 있듯 앰프는 오디오 같은 전기 신호를 증가 시키는 전자 장치이니 추의 길이를 늘이는 것을 앰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계 추는 진폭과 증폭을 설명하기 위한 예에 불과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전자 장치가 아닐지라도 증폭의 개념을 우리 생활에 까지 확장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전기 신호를 몇 배 증폭하는 계산보다 10원을 100원으로 만드는 기술이 더 흥미로워 보이니까.


추의 길이를 길게 하는 위의 예에서 진폭이 2배 증가했으니 이 앰프는 증폭율이 2배라고 말한다. 증폭률이 2인 앰프는 무엇이든 입력 값을 2배로 키워 출력으로 내 보낸다. 말하자면 “곱하기 2” 기계다. 1을 넣으면 2가 나오고 3을 넣으면 6이 나온다. 10을 넣으면 20이 나오고 100을 넣으면 200이 나온다. 뭔가를 넣어서 더 크게 되어 나오니 전기 신호만 증폭하는 앰프 말고 현실 세계에 사용할 수 있는 앰프가 있으면 좋겠다.




고약한 앰프의 성질, 빈익빈 부익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좋은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앰프에게도 몇 가지 단점이 있다. 우선 무엇이든 크게 만든다는 점이다. 장점을 키워 더 큰 장점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좋지만 단점을 키워 더 큰 단점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점수 10점을 100점으로 만들거나 소고기 500g을 5kg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과체중 2kg을 4kg으로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10원으로 100원을 만드는 증폭율 10배인 앰프에 100원을 빌리면 빚이 1000원이 된다. 사채보다 무서운 증폭이다. 하지만 이자가 더 붙기 전에 원금 100원을 갚으면 앰프가 1000원 갚은 셈으로 계산해주니 아주 꽉 막힌 놈은 아니다. 아까 시계 추를 그린 도표에 표시를 하면서 차근차근 따져보자.



그림 2. 도표에 눈금을 표시하고 증폭을 표시


추가 묶여있는 지점이 원의 중심점이고, A와 B를 연결하는 선분 AB와 C와 D를 연결하는 선분 CD를 그려보자. 원의 중심에서 추가 흔들거리지 않고 서 있는 지점을 연결하는 선을 그으면 중심선이 된다. 선분 AB의 길이가 약 6cm 이므로 중심점을 0이라고 하면 왼쪽으로 1cm 단위로 -3, -2, -1을 표시할 수 있고 오른쪽으로는 1, 2, 3cm 지점을 표시할 수 있다. 선분 CD는 길이가 약 13cm 이지만 편의상 12cm라고 하면 왼쪽부터 -6, -5, -4 ... 0, 1, 2 .... 6 까지 표시된다.


이제 중심점에서 선분 AB를 지나 CD에 이어지는 임의의 선을 그린다. 임의의 선이 지나는 선 AB 위의 한 지점이 입력 값이고 임의의 선이 지나는 선 CD 위의 한 지점이 출력 값이다. 예를 들어 중심점에서 선분 AB 위의 포인트 2 지점을 지나는 긴 선을 그리면 선분 CD 위에서는 4 지점 위를 지나게 된다. AB 위의 1은 CD 위의 2로, 2는 4로, 3은 6으로 나타난다. -1은 -2로, -3은 -6 지점에 나타나는 것도 볼 수 있다. (-2) x 2 = -4 라는 수학적인 계산 방법과도 맞아 떨어지는 그림이다.


전기적인 앰프도 원리가 같다. 앰프는 입력값이 기준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차이를 증폭한다. 그림에서 기준점이 0이고 입력 값이 선 AB 위의 한 점일 때 출력값은 선CD 위의 한 점이 된다. 이 점은 중심점에서 입력값 위를 이은 직선의 연장선 상에 있다. 시계 추의 예에서와 같이 + 입력은 커지고 - 입력은 더 작아진다. (- 방향으로 더 커진다)




공짜는 없다


앰프의 또 다른 단점이라면 욕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없이 제공되는 뇌물이 없듯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세상을 구원할 것 같던 앰프도 결국 속내를 드러낸다. 10원을 100원으로 만들어 주는 비용으로 1천원을 내라고 말하는 식이다. 더구나 앰프로서는 당연한 요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0원을 100원으로 만드는 기술은 독자적인 기술이고, 사용자가 그토록 원하는 기술이니 1천원이 무엇이 아깝냐는 것이다. 웬지 가슴이 답답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하고 보니 한편으론 타당한 주장 같기도 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시계 추를 10cm 길게 하는 것은 처음 추를 움직이는 것 보다 5cm는 더 밀어야 하는 힘이 필요했다. 10원을 100원으로 만드는 1천원은 아깝지만 시계추를 10cm 더 길게하고 추를 5cm 더 미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내 지갑에 든 천원은 아깝지만 내 몸 움직이는 수고는 아깝지 않으니 내 몸 보다 천 원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 아,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앰프의 성질을 이용해 내가 증폭하기를 원하는 것과 앰프에게 제공하는 것을 분리하면 억울한 마음도 사라진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시냇물 처럼 나에게 아깝지 않은 것을 제공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받아 내는 원리다. 물 100리터와 콩 한 바가지를 주고 물레방아에 주면 콩가루 한 바가지만 돌려 받는다. 물 100 리터는 시냇물이었으니 아깝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콩가루를 얻었다. 물레방아는 그것이 콩이든 팥이든 상관 없었다. 그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 물 100 리터면 충분했다. 서로 만족하고 아깝지 않은 거래가 성립된다.


오디오 앰프도 비슷한데, 집에서 사용하는 220V 교류를 공급해 30V 정도의 빵빵한 직류를 만든다. 앰프가 원하는 것은 이 직류다. 앰프에게 30V 직류를 꾸역꾸역 먹여 주면서 내가 사용할 오디오 신호를 함께 넣으면(약 1mV 정도의 교류) 직류는 앰프가 사용하고 출력으로 1~2V 교류를 뽑아낸다. 교류니 직류니 하는 말은 어렵지만 결과로만 보자면 220V 교류 시냇물로 30V 직류를 만들어 앰프를 가동한다. 이것은 220V 시냇물로 물레방아를 돌린 것이다. 앰프가 30V 직류를 사용하면서 무엇이든 증폭할 준비가 되었을 때 1~2mV 정도의 신호를 보내면 1~2V 정도의 신호로 증폭해준다. 물레방아에 콩을 넣고 콩가루를 받아 내는 것과 비슷하다. 1~2mV 콩으로 1~2V 콩가루를 얻었으니 나는 1천배 증폭을 얻었고 220V 교류를 앰프에 헌납했다. 앰프는 220V로 30V 전기를 만들어 마음껏 먹으며 1mV를 1V로 만드는 소소한 일을 한거다. 


증폭은 그런 거래의 결과다. 오디오 세계에서는 앰프가 사용할 30V의 직류를 만들어 내는데 많은 노력을 한다. 그래야 앰프가 좋은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단지 1천배의 증폭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들어간 신호와 얼마나 똑 같이 생긴, 그러면서도 커진 신호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앰프가 일하기 좋도록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넣는다. 효율을 버리고 품질을 얻는 것이기에 비효율도 칭찬을 받는다.




나의 증폭률, 내 인생의 앰프


장작을 피워 물을 끓인다. 가스가 떨어져 비싼 장작으로 물을 끓인다. 비싼 장작이 타는 동안, 위에 무엇을 올려 놓아도 상관 없이 타고 있을 장작 위로 물을 끓이고 라면을 끓인다. 장작의 효율 보다 배고픔이 먼저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반드시 어떤 것이 소비되거나 사용되어야 한다. 대부분은 얻는 것 보다 더 많이 소비된다.


나의 환경, 나의 능력 10원으로 100원의 결과를 내고자 한다면 천 원 정도의 노력이 소비되어야 한다. 비효율적이고 이익을 보는 것 같지 않은 거래처럼 보인다. 에너지 효율 10%인 사람이 50점을 얻기 위해선 500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앰프는 비효율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결과가 좋지 않을까봐 일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비효율이라도 일을 하는 것이 나으니까. 앰프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결과를 내고 있기에 당당하다. 난방기 처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기들은, 그것이 주는 장점에 비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제공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면 부당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덜 주고 많이 받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어도, 준 것 이상으로 받기를 바라는 것은 바램일 뿐이다. 적당한 운동으로 놀랄만한 다이어트를 바란다거나, 벼락치기 공부로 높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다. 앰프로 내 인생을 증폭할 수 있도록 묵묵하게 에너지를 갖다 바칠 차례다.




:: 월간 개벽신문 14호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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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7. 11. 15:30

칼럼: 펑션형 인간 by 92012. 7. 11. 15:30

펑션(Function)은 함수다. 함수는 어떤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연결하는 규칙을 말한다. A에서 B로 이어지는, A가 B로 바뀌는 규칙, 마술 같은 이론이다. 말로는 거창하지만 사실은 별거 없다. 예를 들어 2에서 4로 바뀌는 마법은 “곱하기 2”라는 식이다. 너무 시시한 마법이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함수는 이렇게 쉬운 것에서 출발한다. 함수가 펑션이고, 펑션이 함수다.



함수는 수학 시간에 들어 본, 어렴풋이 생각나는 이름일 수 있다. 수학이라는 과목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지만 펑션은 우리 생활에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커피 자판기도 펑션이라 할 수 있다. 커피 자판기 펑션. 동전에서 커피로 연결하는 규칙, 동전이 커피로 변하는 마법이다. 뭘 넣으면 뭐가 나온다 하는 해석이면 모두가 펑면일 수 있다. 전기를 넣으면 불이 켜진다. 램프의 펑션은 그렇게 해석 할 수 있다. 주고 받는 거래와도 비슷하다.


펑션은 입력과 출력, 그리고 그 사이의 변화규칙으로 이뤄진다. 변화규칙이 바로 그 펑션의 이름이자 기능이다. 커피자판기 펑션에서 입력은 동전, 출력은 커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계 내부의 움직임이 변화규칙에 해당한다. 변화규칙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출력물인 커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펑션을 이용하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제를 단순화 시켜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커피 자판기 경우 처럼 어떻게 커피를 만드는지에 대한 의문은 미뤄두고, 주고 받는 것에만 집중해서 문제를 단순화 시킬 수 있다. 이해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문장으로 풀이 될 때까지 문제를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 부분이 꼬였는지 어느 부분이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있는지 찾아낼 수 있다.


샛길로 빠지기 쉬운 중간 단계의 복잡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나면 큰 그림이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는 설계도를 그리기가 쉬워지는거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같은 문제 풀이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문을 닫는다. 어떻게 넣을까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전체 흐름은 문을 열고 넣고 닫는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데 펑션이 사용된다.

각각의 펑션을 어떻게 만들지는 그 다음에 생각한다. 이미 만들어진 펑션을 사용할 수도 있고, 펑션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다. 펑션을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필요로 하는 출력을 만들어줄 펑션을 고르는 것, 그 펑션이 원하는 입력을 넣어 주는 것 그렇게 2가지면 된다.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면 햄버거가 나온다. 패티를 어떻게 굽는지, 빵을 뒤집어 굽는지 어떤지, 토마토를 몇 센티 두께로 자르는지 등은 펑션의 처리 부분에 해당된다. 내 맘에 드는 햄버거를 내어 줄 펑션을 고르는게 사용자의 할 일이다.


업무를 아랫사람에게 위임하지 못하는 상사라면 특히나 펑션의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펑션은 하향식 업무 처리 방식이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에서 사용하기 좋다. 펑션식 일처리는 문제를 분석하고 세분화 시켜 하위 단계로 문제를 배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위 단계는 자신이 담당한 문제만 해결하면 되기 때문에 전체 문제를 대하는 상태보다 부담이 덜하다. 또한 지시 받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세분화 시킬 수도 있다. 상위 단계에서 받은 것 처럼, 자신이 스스로 상위 단계가 되어 하위 단계를 만들 수 있다. 상위 단계에서 받은 문제를 더 쪼개 하위 단계로 문제를 내려 보낸다. 펑션의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잡한 문제도 결국은 작고 단순한 문제로 세분화 될 수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집합으로 처리해 나갈 수 있다.


주의할 점은 결과를 낼 만한 펑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곱하기 2 펑션을 사용하고서 곱하기 100의 결과를 바랄 수는 없다. 그래서 펑션식 일처리의 단점은 전체 그림을 잘 못 파악했을 때 발생한다. 펑션의 하위 클라스는 단순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상위 클라스는 문제를 배분하고 결과를 보고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하위 클라스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의 결과가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알지 못한다. 전체 구성이 잘 못되면 결과도 잘 못 나오는데 각 단계에서 그것을 알 수 없다.

“저는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그게 그런 결과를 초래할 줄 몰랐습니다.” 라고 하위 단계의 펑션은 말할 수 있다. 정말이지 하위 단계의 펑션은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상위 단계의 펑션은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시킨 것은 그게 아니다”라고 억울해 할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태다. 펑션 자체의 문제인 것인지, 펑션 자체 보다는 펑션과 펑션 사이의 배치를 잘 못 해 발생한 에러인지를 구분해 낼 수 있어야 잘못의 책임을 따질 수 있다.


현실은 대체로 펑션 자체에 에러가 있다는 결론이 나곤 한다. 그렇지만 하위 펑션의 에러에 대한 책임이 상위 펑션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하위 펑션에 업무를 배분하는 것은 상위 펑션의 업무다. “아랫 사람이 잘 못 이해해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라며 변명 할 것이 아니라 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 function image from http://en.wikipedia.org/wiki/Function_(mathematics)

:: elephant image from http://uncyclopedia.wikia.com/wiki/HowTo:Fit_an_elephant_into_the_refrigerator



:: 월간 개벽신문 11호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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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5. 9. 17:37

칼럼: 2유로 기계 by 92012. 5. 9. 17:37

2 유로 기계

돈 먹는 자판기가 불쾌하지 않은 이유




독일의 함부르크 공항에 독특한 광고 포스터가 세워졌다. 예쁜 일러스터로 구성된 이 포스터는 그냥 한 장짜리 그림이 아니라 입체 동화책 처럼 그림의 일부가 움직인다. 얼핏 보면 그저 이쁘기만 한 포스터가 “2유로를 가지고 세상을 움직여 보자”는 내용의 기부금 모금함이란다. 도미노 블럭이 하나씩 무너지며 진행하는 것 처럼, 핀볼 기계가 동작하는 것 처럼 이 포스터도 동작한다. 포스터에 들어있는 작은 그림들이 움직이는, 그래서 사용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기계다. 2유로를 넣어야 움직이기 때문에 “2유로 기계”라고 불린다.


포스터 위쪽에 커피 자판기 처럼 동전을 넣으면 병원이 세워지고, 엠블런스가 다니고,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우물에서 물이 샘솟고,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대학이 열리고, 라이브 콘서트가 개최된다. 물론, 그림판이 움직이면서 표현하는 것이다. 인형극 처럼, 동화책 처럼 그림들이 움직인다. 동전을 넣은 사람의 모습도 사진 찍는다. 승인하면 기부자 명단에 등록하기 위해서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기술을 사용했지만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기부금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독특하다.


2유로 기계는 독일의 자선단체인 “미제레오르(Misereor http://misereor.de)”가 세운 기부금 모금 광고다. 미제레오르는 복지와 교육시설, 기아와 재해복구를 지원하는 천주교 기반의 자선단체로 우리나라에는 6.25 전쟁 직후에 많은 도움을 준 인연이 있다.



광고판? 모금함? 이것이 기계라고?


이 광고판의 흐름은 이렇다. 2 유로 짜리 동전을 넣으면 타이틀인 “MIT 2€ VIEL BEWEGEN” 글자가 흔들린다. 직역하면 “2유로와 함께 더 많은 감동을” 정도 되겠다. 동전은 앰플런스의 앞 바퀴 자리에 들어 간다. 경사로를 따라 앰블란스가 전진하면 동전은 앞바퀴가 돌듯 회전한다. 엠블런스가 마을 그림에 도착하면 동전은 아래로 떨어지고, 지렛대를 건드리면서 마른 우물에 물 그림이 채워진다. 동전이 굴러가는 방향을 따라 물동이에 물이 차 오르고 나무가 불쑥 나타난다. 물을 공급하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꾼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동전이 다음으로 도착한 곳에 카메라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림 카메라에서 불빛이 몇 번 깜빡이더니 광고판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다. 그 다음으로 동전이 내려오면 코끼리가 있는 숲의 건물에서 “Schools Open” 푯말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다음 단계로 동전이 떨어지면서 풍차를 돌린다. 풍차가 돌면 마을의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연상이 된다. 동전은 이제 아이의 축구공이 되었다. 꼬마가 동전을 드리블 하며 가는 곳은 “UNIVERSITY”. 동전이 대학 건물을 지나면 큰 건물의 창이 열리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공연장을 지나고 동전이 도착하는 곳에 동전을 넣은 사람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버튼을 눌러 공개에 동의하면 페이스북에 기부자 명단에 등록된다. 동전은 이제 마지막 안내 장치인 손가락을 흔든다. 손가락 모양이 가르키는 곳에 미제레오르의 QR코드가 있다. 내가 넣은 동전이 어떻게 쓰이는지, 그 돈을 모아서 집행하는 기관이 어디인지 안내하는 것이다.



광고판에 숨어있는 기술들


포스터의 재미있는 움직임들은 물리적인 기계 장치와 전자장치의 동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리적인 기계장치는 동전이 떨어지면서 건드리는 걸림쇠, 동전이 물체를 끌고 가기 쉽도록 기울어진 경사로, 동전이 떨어지면서 돌리는 풍차의 톱니바퀴 등이다. 그 다음은 카메라를 동작시키고, 사진을 찍고, 사진 데이터를 페이스북에 올리는 과정들이 전자 회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다. 전자장치를 설계한 사람은 알렉산더 위버씨로 프로그램 매니저,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직업이다. 위버씨가 사용한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나하나 따져보면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라기 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미 발표된 여러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은 찍는 카메라는 웹캠으로 일반적으로 인터넷 채팅 등에 사용하는 작은 USB 카메라다. 기부금을 낸 사람이 자신의 사진을 등록할지 말지 결정하는 버튼은 USB 키보드를 뜯어서 사용했다. 웹캠을 동작시키는 것은 아르두이노(Arduino)라는 공개 하드웨어 장치와 프로세싱 이라는 언어를 사용했는데, 웹캠을 컨트롤 하는 라이브러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란다. 아르두이노는 어떤 새로운 장치를 개발하고 테스트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소형 컴퓨터다.


촬영한 사진은 7인치 USB 디스플레이로 출력하고 호스트 컴퓨터인 맥미니(MacMINI)에 설치된 아파치 소프트웨어로 페이스북에 업로드 한다. 인터넷 연결은 3G 스틱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로 보자면 3G 망을 사용하는 인터넷 공유기 정도 되겠다. 물리적인 연결은 이런 정도인데, 위버씨는 여기에 드롭박스를 통해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접근성을 용이하게 했다. 드롭박스는 인터넷을 통해 폴더를 공유하는, 파일공유 시스템이다. 역시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반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 서비스다. 웨버씨는 드롭박스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고, 로그파일을 들여다 보고, 고장여부를 판단하고 했다. 파일이 자주 변경되면 드롭박스의 업데이트가 잠시 중단된다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지만 2유로 기계의 동작이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기술이 감동을 주는 조건


남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기술을 사용했다고 해서 위버씨가 실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간편하고 쉬운 개발 방법을 택했다. 남들이 따라 하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기술들을 종합해 기능을 구현하는데 적합한 도구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기술이 우아하게 느껴지는 것는 전체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이 동작하는 기술이 우아하다.


2유로 기계의 메인 CPU의 클럭속도가 얼마나 빠른 것이었는지, 카메라로 사용된 웹캠은 몇 만 화소나 되었는지에 따라 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질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기술이 이야기에 숨어 알듯 모를듯 슬쩍 도와줄 때,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기술을 보여주는 포스터에는 감동이 없지만, 감동을 주는 포스터에는 기술이 있다.



참고 :

포스터 제작사 Bomboland (이태리)

http://bomboland.com/

알렉산더 위버 (독일) 블로그에 소개된 2유로 기계

http://tinkerlog.com/2012/03/30/the-2-euros-machine/




월간 개벽신문 9호(20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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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5. 9. 17:10

칼럼: 허세로운 생활의 실전 메뉴얼 by 92012. 5. 9. 17:10



허세적인 삶
허세로운 생활의 실전 메뉴얼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이외의 것들은 허세로구나. 취미 활동 혹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독서나 음악감상 같은 흔하디 흔한 것에서 부터 특색있는 맛 집을 다니며 음식을 먹고 여기에 와인이나 사케, 막걸리 같은 술들을 마시며 맛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카메라, 여행, 애플 제품 같은 비교적 돈이 들어가는 것들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거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지출, 게다가 그런 활동들을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알리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잘난체 하려고 안달난 사람으로 보일 수 밖에.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전전긍긍 하는 것 보다, 기왕 이렇게 보이는거 제대로 허세롭자는 오기도 생긴다. 허세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생활의 팁을 소개한다.


독서는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 부터

책 읽기는 허세적 생활의 기본활동이다. 독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미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취미이기도 하다. 책 좀 읽는다고 내색하려면 늘 새로운 책을 끼고 다니는 수 밖에 없는데, 막상 그러기는 쉽지 않고 돈도 많이 든다. 책을 덜 읽고 많이 읽은 티를 내려면 온라인 서점의 카테고리를 파악해 관심있는 책들의 소개를 읽는 것이 좋다.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해당 분야의 책은 항상 있다. 해당 카테고리에서 책 목록을 살펴보고 책 소개를 읽고 관심이 가는 책들을 저장해둔다. 해당 카테고리를 자주 들여다 보면 주로 활동하는 저자가 보이고 유행하는 책의 흐름이 보인다. 출판사의 소개글과 전문가의 서평, 독자들의 평가도 눈여겨 볼만하다. 꾸준하게 보다보면 정말 사고 싶은 책도 생기고, 사보게 되는 책도 생긴다. 해당 분야의 여러 책들을 검토했으니 어떤 책이 더 나을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된다. 책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분야의 정보를 얻게 되니 아는체 하기도 좋다. 마치 그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말하기는 더욱 복잡한 기술을 필요로 하니 함부로 사용할 일은 아니다. 폼나는 방법은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고, 이런 종류의 책들이 있고 요즘 트렌드가 이렇더라 정도 말하는 것이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아는체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음악감상은 클래식으로

독서 다음으로 많은게 음악감상이다. 이것 역시 어지간해서 티나지 않는 취미다. 음악 좀 듣는다 할라치면 역시 많은 음반을 구입하고 소장 음반을 자랑하는 방법이 전통적이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냥 돈 많은 사람 혹은 쓸데 없이 돈 쓰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음반 보유량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다. 항상 더 많이 보유한 사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음악을 듣고, 음악 좀 듣는 다는 소리 좀 들으려면 클래식 음악으로 작곡가 한명을 파는게 좋다. 클래식 음악이 다른 음악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클래식은 유행을 덜 탄다. 고전의 힘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알아 보는 사람이 많다. 지금 모짜르트를 듣고 외우면 10년 뒤에도 모짜르트 음악을 알아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알만한 작곡가 1명으로 시작해 점점 넓혀 나간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듣는다면 구입하는 음반의 수가 많지 않아도 음악적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음악 감상을 할 때 악보와 함께라면 음악가 더 친해질 수 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전환이 되는 것인데, 막연하던 음악이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와 전체가 보이게된다. 다행히도 클래식 음악은 악기점에서 악보를 구하기가 쉽다. 예를들어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골랐을 때, 그 악보는 인터넷으로도 구할 수 있고 악기점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악보를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악보 읽기는 초등학교 때 부터 이미 여러차례 배운 적이 있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악보읽기는 공부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영어 보다 쉽고 결과를 느끼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약간의 노력으로 많은 이득을 누릴 수 있다. 음악을 말그대로 여러번 듣다보면 악보 읽기가 해결된다. 보다 보면 음악이 보이고, 그때 보이는 음악은 이전까지의 음악과 다르다. 많이 들어본 그 말이 음악과 악보에도 적용된다. 이런 음악감상은 아는체 하기 위한 빠른 방법이기도 하고 음악을 진짜 좋아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꼼수와 정수가 멀지 않다.


와인, 사케, 막걸리

와인과 사케, 막걸리가 다르지 않다. 모두 발효로 만들어지는 술이란 점에서 그렇다. 와인은 포도를 숙성해 술로 만든 것이다. 일본 술인 사케는 쌀을 숙성해 만든다. 막걸리도 그렇다. 쌀이나 포도에 들어있는 당분을 알콜로 만들어 만든 것이다. 위스키나 소주와 다른 점은 제조방법이기도 하지만 폭탄주나 과도한 폭음에 어울리지 않는 술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폼나게 마실 수 있는 술인 셈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소주와 달리 와인이나 사케, 막걸리는 제조업자나 재료, 기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특징들이 있어서 그런 것을 맛보고 이야기하는 취미가들이 늘었다. 취하려고 마시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뭐하는 짓인가 싶은 활동이지만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는 또 다른 분야다. 라벨에 쓰여있는 지역명, 생산회사에서 만드는 다른 술들, 그 지역의 특산물 등을 찾아보다 보면 지역에 대한 정보도 정리가 되어 여행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술 마시는 취미에서 지역적인 정보와 여행으로 발전하게 되는 취미다. 맛을 평가하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니어도 충분히 즐길 거리가 많은 취미라 할 수 있다.


양보할 수 없는 허세적 삶

대부분의 취미나 여가를 보내는 활동이 다음 달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함으로 다음달에도 또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될 수는 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몰두하다 보니 많이 알고 싶어지고, 궁금하니 공부하고, 공부하니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고, 할 수 있는게 많아지니 생활이 바빠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바빠지는게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해서 바쁘니 사는게 즐겁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래 나 허세야~ 하고 인정 해버리면 쉬워진다. 허세처럼 보일까봐 혹은 내게 어울리지 않을까봐 망설였던 것들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 보자. 어쩌면 처음부터 꿈꿔왔던 삶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월간 문화적허세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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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5. 9. 17:00

칼럼: 궁극의 감성로봇 by 92012. 5. 9. 17:00



밋밋한 박스에 스위치가 하나 있다. 이 스위치를 켜면 박스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밀어 끄고, 다시 박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잠해진다. 생뚱 맞지만 이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로봇이 있다. 일을 하라고 스위치를 켰는데 일을 안하겠다고 스위치를 꺼버리는게 이 로봇의 일이란다. 유튜브의 채널인 “취미로 로봇을 만드는 사람들(The Latest In Hobby Robotics)”에 소개된 이 로봇이 궁금해졌다. 로봇이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뭔가 이로운 것을 하는 장치인데 이 로봇은 도대체 무슨 이로운 점이 있는가.

이 로봇은 꽤 다양한 버전으로 발표되고 있다. 만드는 사람이 이 로봇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지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가장 쓸모 없는 기계(Most Useless Machine)”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는 짓이 화난 아이처럼 보인다고해서 “혼자 있게 냅둬 로봇(Leave Me Alone Box)”이라고 하기도 한다. 쓸모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그냥 만사가 귀찮은 것인지 그저 혼자 있게 내버려 둬 달라는 로봇, 쓸쓸함을 즐기는 고독한 로봇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스스로 일을 그만 둘 줄 아는 로봇이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채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로봇이기도 하다.

최초 명칭은 “울티메이트 머신(Ultimate Machine)” 이었다. 궁극의 기계.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입장에서 기계란 이래야 한다는거다. 단순 명료하게 더하고 뺄것도 없이 완전한. 미국의 수학자이자 전자통신 분야의 이론가인 클라우드 쉐넌(Claude E. Shannon)이 만들었다. 그는 컴퓨터 체스의 원리, 미로를 찾는 로봇 쥐의 원리를 개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시대에는 암호 기술이론으로 활동한, 좀 옛날 사람이다. 그 역시 재미로 만들었다는 울티메이트 머신은 그 단순하고도 재미있는 동작 때문인지 취미로 로봇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 자신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자랑하는 프로젝트로, 또 입문과정의 학습 프로젝트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입문과정에서는 구현 원리에, 하드웨어 제작에 치중하는 쪽은 엔틱 케이스나 동작의 우아함을, 소프트웨어 쪽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 구글이미지로 검색하면 많은 회로도가 공개되어 있으니 회로도를 보고 전구와 스위치를 구분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울티메이트 머신을 직접 만들어 볼만하다. 가장 간단한 버전은 스위치 2개, 모터 1개, 배터리와 딱딱한 케이스로만으로 공작할 수 있다.

전문가 버전으로는 최근에 발표된, 회로사(回路師, Kairoshi)라는 닉네임의 일본 사람이 만든 것이 독특하다. 스스로 스위치를 끄는 동작은 똑같지만 그것 조차 여러번 반복하면 로봇이 화가 난다는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면서 스위치를 건들이지 못하게 한다. 또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주변을 흐트러뜨리고 최후에는 스위치를 박스 안으로 감추어 버리기까지 한다. 초기 버전보다 상당히 히스테릭해지고 과격해졌다. 그런데도 웃음이나고 재미있다. 이 로봇이 가진 근원적인 모순과 비슷하다. 일을 하라고 하는데 꺼버리는 것, 과격해 졌는데 웃음이 나는 것 그런 것 말이다. 싸워서 어색한 친구에게 “네 모습이 이래~” 하고 보여주어도 좋겠다. 스위치를 툭툭 건드리다 보니 분명해진다. 이 로봇은 혼자 있고 싶은 사람에게 위로와 웃음을 주는 궁극의 감성로봇이다.


월간 개벽신문 8호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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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2. 2. 8. 09:25

법화경에 마음을 담다 by 92012. 2. 8. 09:25


김청자 여사는 법화경을 사경(寫經)하고 있다. 사경은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인데 석가모니의 뜻을 문자로 전하는 불교수행의 한 방법이다. 법화경은 불가의 주요 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 주요 사상이라고 한다.

김여사는 매일 아침상을 치우고 베껴 쓰기를 시작하는데 지금은 6번 째 노트를 쓰고 있다. 법화경을 필사하는데는 90매 노트 7권 정도가 든다고 하니 후반부쯤 된다. 여름에 시작해서 지금은 여섯 달이 지난 상태다. 도중에 백내장 수술로 두어 달 쉬었으니 그리 꾸준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노트에는 날치기로 쓴 글씨 없이 또박또박 여유있게 쓰여있다. 필사는 마음을 담는 일이기에 급할 수록 쉬어가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글씨가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김여사는 한 문장 쓰고 쉬었다가 또 한 문장, 서둘지 않고 써야 한다고 말한다. 한 권을 베껴 쓴다는 것은 형식일 뿐, 사경은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하루 한장이든 두 장이든 천천히 쓰면 된다. 나이 칠십 넘어서 급할끼 뭐있노~”

한 권을 마칠 때 마다 노트 뒷 표지에 소원도 쓴다. 우리 아들 잘 되게 해 달라고, 우짜든지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게 해달라고. 마음을 담아서 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으로 옮겨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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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1. 11. 18. 20:48

2kStory: 이벤트 극장 by 92011. 11. 18. 20:48

  사무실 문 한테 받은 이벤트 내용은 이렇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남자가 화장실에 간다. 공연이 시작되어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가 불안해 할 때 남자가 피아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간다. 남자는 묵묵히 피아노를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면 무대가 어두워지고 여자에게 보내는 영상 메세지가 나타난다. 메세지가 끝날 때 남자는 여자 곁에 꽃을 들고 서 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한다. 퇴장 할 때까지 아름다운 음악이 깔린다. 이런 줄거리.
  우리 아트홀이 처음부터 사랑고백의 이벤트로 대관하지는 않았다. 극장을 빌려 사랑고백 이벤트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 일이 잡지에 소개 돼 하나 둘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상적인 공연보다 이벤트가 더 많다. 사장도 싫지는 않은지 대놓고 영업을 하진 않지만 이벤트 대관을 막지 않는다. 이벤트를 위해 공연 대관을 미룬 적도 있다. 사장은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가진 음악 애호가로서 명성을 유지하면서 이벤트 대관으로 실속을 챙기는거다. 본연의 업무인 숙박보다 대실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좋은 모텔과 비슷하달까.
  문은 대관 담당자지만 고백 이벤트의 연출을 즐긴다. 남이 시키는 것만 하다가 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와서 좋단다. 때로는 대관자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넣기도 했는데, 덩치가 짱구 춤을 추기도 했고 불뚝 배를 내민 채 걸그룹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가 ‘여자는 이런 것에 약하다’ 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설득 당한다.
  오랫만의 외출, 클래식 음악회, 근사한 곳에서의 식사... 보통 그런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벤트는 통속적인 스토리에 맞춰 진행된다. 유치해서 오글거리기는 해도 당사자들에겐 효과만점이다. 사전 협의 내용에 따라 여러가지 설정을 선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이 무슨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과 비슷하다.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없다. 결혼식에 일정한 패턴이 있듯이 이런 이벤트도 비슷하다. 시작만 조금씩 다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한 쪽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놀라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낭독하고, 울고, 끌어 안고, 또 울면서 끝난다.
  사람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조명이 꺼지고 탑 라이트가 들어오는지, 배경음악이 목소리를 방해하지는 않는지, 바닥에 포그가 살짝 깔렸는지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지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줄 안다. 영화처럼 짜잔~ 나타나는 것은 없다. 모두가 수동으로, 하나씩 대본대로 진행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절로 일이 일어난 것 처럼 일을 마치야 자연스럽다.
  만사가 귀찮은 무대감독은 수당이 느는 것도 아닌데 책임만 늘어 귀찮다고, 조명실 최는 닭살 스러운 행각이 보기 싫다고, 사무실 문은 세상에 자기들 밖에 모르는 사람 시중 드는 것 같아 짜증난다고 말한다.
  암전 중에 자리를 이동하던 남자가 넘어져 무대감독이 후래쉬를 켜야 했고, 여자는 애써 못본 척 했다. 어쩌면 이미 감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자연스럽지 않았다. 무대감독은 자기가 남자의 목숨을 구했다고, 남자를 부축하다 까진 무릎을 보이며 낄낄거린다. 조명실 최는 그 남자가 평생 쥐어 살거라며 혀를 끌끌 찬다. 사무실 문이 눈을 흘기면서 이미 극장에 올 때 부터 눈치 챈 것 같았다고 말한다. 화장이 과했는데 떠서 이쁘지는 않았다고. 사무실 문은 여자는 이런거 좋아한다고 말한다. 은근히 이벤트를 바라는 것 같아 조명실 최는 부담스럽다. 세상 모든 이벤트 하는 것들 다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한다. 이 여자에게는 어떤 이벤트가 필요할까. 어지간한 이벤트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 최는 부담스럽다.
:: 1pagestory.com 한단설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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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11. 6. 8. 10:15

며칠 전 꿈에 아버지를 만났다 by 92011. 6. 8. 10:15

꿈에 아버지와 만났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계셨다. 젊을 때 얼굴을 쓰고 있었는데, 석고같은 것으로 틀을 떠서 만든 마스크 같았다. 급하게 만든 것처럼 마감처리가 덜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얼굴 상태가 좋지 않아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하셨다. 평소 아버지 말씀하시는 말투 그대로 조금은 차분하게 조금은 피곤한듯 조금은 친절하게, 상세한 설명을 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선 말해봐야 너만 피곤할테니 뺄껀 빼고 결과만 말하는 스타일이다.

마스크 안쪽이 궁금하지 않았고 굳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 아직 집에 계시는구나, 가다가 다시 오셨구나, 오셨는데 굳이 말씀하시거나 하지 않으셨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친구분들과 여행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혼자 돌아와 일정보다 일찍 돌아온 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시는 그런 상황 같았다.

“으.. 응... 가다가 뭐가 잘 못 되어서 돌아왔다. 별 일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의 말이었던 것 같다. 모두 함께 돌아온 것인지, 혼자만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 마라 하는 분위기였고 나도 상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옆에서 내용을 미리 알고 계신듯 미리 말하지 못 한것을 미안해 하시는 듯 보였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것이 불편하지 않았고 또 잘됐다 싶을 정도로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돌아오셨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나는 편하게 계시면 좋겠다. 돌아와서 미안해 하는 모습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편하게 계시는게 나로서는 좋다. 많이 누리지 못하셨으니까 마음 편하게 지내시면 좋겠다. 뭐 필요한게 있다면 해 드리고 싶은데, 내가 눈치가 없어서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뭔가 준비가 덜 되어서 가고 싶은데 못 가신건지, 그냥 가고 싶지 않아서 돌아오신건지 모르겠다. 아들에게 손 벌리는 것이 싫으셔서 말씀을 안 하시는건지, 나는 그런 배려가 오히려 불편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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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9. 10. 5. 14:54

참 멋있는 친구가 있다 by 92009. 10. 5. 14:54

참 멋있는 친구가 있다.

1.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신이 목표한 외국어 공부를 한다. 외국어라서 멋있다기 보다, 무언가 자신이 계획한 일을 실천하고 있다는 자체가 좋아 보인다. 스스로 세운 계획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약속 장소로 나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게으를수록 잘 알기 마련이다.

2. “나를 위해 내가 투자하는 시간” 을 설정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특히 스스로 시간을 귀하게 사용한다. 내가 일부러 투자한 시간인데 어떻게 소흘히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타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거참, 부러워 따라하고 싶어지는구만.

3. 현재 일을 버거워 하지 않는다. 일이 만만하게 여유있어서가 아니다. 일이 많아 바쁘지만, 일에 끌려 다니지 않고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일을 즐기는 사람은 눈 빛 부터 다르다. 일에 눌리지 않고, 일에 치이지 않고 성취감을 누릴 줄 아는 모습, 보기 좋아~

4. 뚜렷한 목표가 있다. 지금 회사에서도 나쁘지 않은데, 실력도 인정 받는 것 같다. 그런데 더 발전된 모습이고 싶어한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애쓰고 있다. 뚜렷한 목표, 뚜렷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불가능해 보이지 않는 목표. 업무와 관련된 외부 활동을 하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모임에도 적극적이다. 목표를 위한 것이든 스스로 갖는 만족이든 하고 있는 활동 대부분이 목표를 향해 다가간다.자연스럽게 목표에 도달할 것 같고, 쉬지 않고 또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 같다. 멈추지 않고 끊임 없이 발전해갈 모습이 기대된다.

잘 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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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9. 10. 1. 02:13

불편한 관계 by 92009. 10. 1. 02:13

갑자기 잠이 깼다. 아버지는 가위에 눌리셨는지 “우어어~ 우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놀라 달려가 아버지를 깨웠다. 아버지는 팔짱을 낀채 잠이드셨나 보다. 옆으로 누운 아버지 팔이 단단히 끼어 있다. 잠과 가위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가위에 눌렸단 사실도 잊은채 다시 잠 들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 드리고 안방을 나왔다. 어머니도 놀란 눈치였지만 몇 마디 말씀과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중학교 때 쯤이었을 거다. 키가 자라느라 그랬는지 운동부족으로 그랬는지 잠자리에 든 나는 자주 종아리 근육이 뭉치곤 했다. 자다 말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놀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종아리가 뭉쳐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만 혼자 사는 기간이 길었던 까닭에 소리치지 않고 혼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암튼, 그 시절에 나는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기억에서 출발한 미움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반항심이었는지 모르겠다.

기억하는 건, 아버지의 크고 바쁜 전화통화 목소리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퇴근 후 집에 일을 가져 오는 것도 좋을 것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열 통, 스무 통이 넘는 통화를 하셨고 나는 그것을 불쾌해하고 뻔히 보이도록 내색했다. 그래봤자 고개를 돌리거나 다락방이었던 내 방으로 쪼르르 자리를 피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끔 아버지가 통화를 하는 중에 베개로 얼굴을 덮어 내가 시끄러운 상황을 싫어한다는 모션을 취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아버지 눈치를 보며 아이들이 싫어한다는 말을 넌지시 건내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일이, 시끄러운 전화통화가 일을 돌아가게 하고 우리 가족을 부양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당히 통화를 계속했다.

자식에게 미움 받고 돈벌이 이외의 분야에서 존재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가족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겨우 그런 이유로도 아버지를 싫어하고 멀리하고 어색해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경직되고 어두워져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싫어하는 아버지가, 밤에 내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면 순식간에 달려왔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불편한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런 밤에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죄송하기도 했지만 뭔가... 겉으로 바뀌는 건 없이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오늘은 아버지 가위눌린 소리에 아들이 달려간다.
어쩌면 최근들어 아버지가 아들을 불편해하고 계신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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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9. 5. 31. 00:35

급한건가 by 92009. 5. 31. 00:35

도장에서, 연습의 마무리는 대련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련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고, 타인의 대련을 보면서 공부한다.
관장님이 그날 그날 시합 상대를 지목해 주는데, 대체로 그날의 컨디션 상태나 수련 정도를 감안하는 것 같다.

태권도 경기도 그렇지만,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상대를 맞 받아 치는 것이 좋아보인다.
- 실제로 태권도가 그런지 안 그런지나 검도에서 받아 치는게 더 좋다라는 말이 옳지 않을 수 있다 -
그런데 둘 다 받아 치려고 작정하고 상대편이 먼저 들어 오기를 기다리면 대련이 이뤄질 수 없다.

나는 그 상황이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기다림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전략도 없이 먼저 움직여버린다.
그래서인지 아직 상대를 때리는 일보다 맞는 일이 더 많고 자세도 어설프다.
샌드백이나 타격대처럼 내가 상대를 위한 연습용 사람 같기도 하다. -_-;

머뭇거리는 것과 성급한 쪽을 택하는 경우에 성급한 쪽을 택하는 일이 많다.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할 수 없고 하는 식의 요행을 바라는 공격을 시도하거나
허점을 보여 상대에게 공격을 하게 하려는 동작이 실제 허점이 되어 버리는... 멍청한 행동들.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을텐데도
나는 그것을 '머뭇거리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하며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는거다.
제대로 기다려 승부를 내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기 보다 머뭇 거리는 것을 더 부끄럽게 생각하는거지...

대련 상황에서 기다림이 지속될 때, 성격이 급한 사람이 먼저 치기 마련이다.
고수일수록 원하는 반격을 위해 상대의 공격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나에겐 먼 이야기지만, 고수가 될 수록 그런 수도 미리 읽고 눈빛으로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다고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업무 관계에서도 나는 그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 참을성이 부족한것 같다.
친하게 지내려고 내 마음을 먼저 드러내고 자잘한 손익에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의도와 다르게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으로, 나약한, 술에 환장한, 과소비하는 사람으로 남기도 한다.

표현이 더 자연스러워 지기를, 상대에게 처음 생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전달되기를,
전달된 생각이나 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기를, 적은 글자 수로 의미가 전달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결국은 한 길에서 만나는 머뭇거림과 성급함 사이에서 나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실행 전에는 머뭇거린다고 재촉하고, 실행 후에는 성급했다고 질타한다.

공격 타이밍이 급하다는, 준비 안된 공격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했어야할 것이었다라고 항변한다.
그래, 어차피 할 것이라면 더 부지런히 잘 해보자.
의도한 바와 다른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조급해 말고.

허술해 보이고 약점이 많이 보일지라도 먼저 마음을 열 것,
게임오버만 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마음이 통할 날이 오겠지.

느긋해보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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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8. 10. 11. 18:06

부끄러워라 by 92008. 10. 11. 18:06

나는 자주 내가 부끄럽다. 실패하는 모습도 부끄럽고, 실패를 못 견뎌하는 모습도 부끄럽다.
무엇 때문에 부끄러워지는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부끄러운 일 중에는 실패해도 상관없는 일들도 많다. 평소 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의상을 하고서 부담스러워 한다던가, 어색한 관계의 사람들 앞에서 의도하지 않은 몸개그를 선보인다거나, 호언장담 했던 일들이 잘 안 풀리고, 술 마시고 평소보다 오버한다거나, 긴장해서 갑자기 목소리 톤이 바뀌거나 떨리는 목소리를 내버리는, 자세를 바꾸다 새어나온 방구, 웃다가 터져버린 콧물 거품, 웃기지도 않은 자기 말에 혼자 웃기같은, 그런 것 쯤은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텐데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쉽게 넘기지 못하고 생각을 키웠다. 순간순간 자연스럽지 못해서 생기는 작은 어색함과, 그런 사실을 떠올려 주는 분들을 만났을 때 나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잘 안 될 수도 있는 일도 많고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일도 많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실수와 용납할 만한 분위기에서 서로 적당히 오버하는 것은 정색하며 깔끔 떠는 것 보다 인간적이다. 비록 바보 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시도하지 않는 것 보다는 시도 하는 것이 낫다.

내 이익을 위한 거짓말, 나 살자고 남을 대신 위기에 넣어 두는 일, 내 지위가 조금 유리하다고 해서 드는 우월감,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의기소침함 등이 사실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더 당당할 수도 있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할 테지만 웬지 그런 일에 나는 상관없는 것 처럼, 내 일이 아닌양 행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상 두렵고 부끄러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굳이 ‘누구나 실수할만 하므로 꼭 너만 그런것은 아니다’라는 인정을 받아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래서 먼저 내 입으로 까발려 버리는 요령도 생긴 것 같다. 그것은 나를 순진해 보이게 한다거나 혹은 악착같아 보이지 않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감추고 싶은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게 감추거나 일부러 드러내 작은 일로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딴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나서서 오버할 일이 아니다.

내 행동이 좀 더 우아해지기를 바란다. 실수를 하더라도 우아아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자연스러움과 유연함은 실수조차 유머로 만드는 힘이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엄격하되 부끄러워 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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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7. 8. 28. 11:10

선물 by 92007. 8. 28. 11:10

꿈에 있었던 일이다.

무슨 기념일이었나. 그녀와 그녀의 친구 커플들이 있었다.
뭔가 내가 선물을 했어야 하는 상황 같았는데 나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었나 보다.
실망한 듯한 그녀의 얼굴, 친구들의 태연한듯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
그녀는 선물을 받지 못한 것 보다 선물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거다.
친구들 앞이라 더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겠고.

당연히 알고 있었야하 하는거 아냐? 라고 말하지만 나는
남자 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대체로 모르고 있다.
자랑도 아니고 변명의 방어막도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거다.

사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데 나는 그게 무슨 잘못인지 모르는거다.
뭐가 잘못인지 알아야 미안하고 사과하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귄다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다고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도 아니고...
무슨 데이가 가까이 지나간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일까나...



그녀는...

우리가 몇년이 넘는 동안 만나고 있었고, 좋아하는 내색을 했고, 이 날에 대한 암시를 했었으므로
당연히 뭔가를(이벤트, 선물 등) 준비했을 것이라 생각(기대)했다. 이런 정도는 친구들 커플을 봐도 그렇다.
나 혼자 유별난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그런 정도의 선물 또는 이벤트가 있었다.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그가 잘못했다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거라고,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키지도 못할 것 같은 약속을 받아 내도 속이 시원치 않다.
그가 사과를 하면 사과 할 것이면 진작에 준비할 것이지~ 하고 또 화가 나고,
사과 하지 않으면 잘 못을 모르는 것에 또 화가 난다.



나는... (그가 아니라 나는)

선물은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서운하긴 해도 요구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못 받아서 서운한 것을 따져 물을 만한 사항도 아니다.
주고 받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므로 꼭 줘야 하는 것도, 꼭 받아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주면 고맙고, 받으면 기쁘고,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좋다.

선물은 그런거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닌거다.

그녀가 기대 했으므로 실망할 수 있다. 실망이 큰 만큼 속상하고 화가 날 법도 하다.
화가 났으니 평소 답지 않은 과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화를 내는 과정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과로 이어지는 프로세서는 어렵다.
나에게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운 감정이 있다. 고마운 감정은 그렇게 나에게서 소비되었다.

답례하고 싶은 감정은 나에게서 새롭게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이 받은 것에 대한 피드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많이 받고 조금 갈 수도 있는 것이고, 조금 받고 많이 갈 수도, 안 받고 갈 수도 있다.
혹은 이 사람에게 받고 저 사람에게 답례하는 경우도 있다.
줬으므로 받으려고 한다거나 이쯤 되면 받을만 하니까 기대하는 마음에는 부응하기 싫다.


...


무슨 일 때문에 꿈에 이런 것이 나왔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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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6. 8. 8. 22:45

나이만 어른이 되었나 by 92006. 8. 8. 22:45

나에게 이롭지 못한 의견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므로 마침표까지 들어 줄만한 여유가 없다.
흥분한 목소리로 욕 한마디 덧 붙이고 주제와 벗어난 인신 공격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동조하지 않는 사람까지 싸잡아 욕을 하고도 한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심판하는 일은 모두 정당하다.
내 의견과 다른 녀석들은 모두 싸잡아 불질러 버려야 한다는 식의 말들.

진실보다는 알고 싶어하는 정황에, 믿고 싶어하는 부분을 유도해 내는 질문을 한다.
대답의 행방에 상관없이 내가 듣고 싶어하는 부분만 발췌해 편집한다.

어른이 되는건 이런 건지도 모른다.

점점 억울한게 많아지고, 남들 앞에서는 하지 못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술자리에서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들이 많아지고 그런 얘기 조차 나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배척한다.

이 들이 집으로 돌아가, 여기선 통하지 않을 얘기들을 하며 자기 편이 되라고 강요한다.
나이 많은 부모님에게, 아내에게,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런 모습으로 말 할 것을 생각하니 서글프다.
(술만 먹으면 전화를 해서 불평을 해대는 것도 마찬가지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고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갈테지.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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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6. 5. 8. 04:39

나를 위한 적금 프로젝트 by 92006. 5. 8. 04:39

나를 위해 적금을 든다.
거창하게 몇 년씩 걸리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큰 금액을 모으도록 계획을 세우지 않고 지치지 않을 정도에서 결과를 느낄 수 있도록,
다음을 위해 남겨두지 않고 나를 위해 소비되도록 하는 그런 계획을 세우는거다.

나를 위한 것 중에서도 경험이나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소비해버려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건을 사거나 더 큰 돈을 마련하기 위한 모음도 나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가족을 위해,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고생하는 자신을 위해 고맙다고 말하자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알려준 이웃은 생일에 10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게 모아서 여행을 다닌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계신다.
올해는 일본으로, 여기저기 발도장 찍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며칠 동안 생활하다 오는 민박 여행을 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조금 더디더라도 좋은 품질의 생활을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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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3. 30. 12:16

25년 차이? by 92006. 3. 30. 12:16

검도 도장에서 연습을 한다. 아직 초보자라 사범님께 별도로 지도를 받고 있지만 시작과 끝 부분의 몸풀기와 명상은 함께 한다. 아직 10대가 되지 못한 아이들 부터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 사람들이 있다. 나와 같이 보철을 낀, 이제 막 10대가 시작된 남자아이가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적어도 25년 정도되는 나이 차이. 저 아이보다 내가 25년 정도 시작이 늦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검도도 그렇고 보철도 그렇다.

보철을 시작하고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가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놔뒀나 하는 거다. 너무나 뻔한 얘기지만 치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 대해서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 같다. 충치와 덧니에 대한 컴플렉스가 치아 관리에 대한 출발점을 뒤로 물리지 않았을까 싶다. 어렸을때, 어른들은 이~ 해보라는 말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분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앞뒤 상황 다 빼고 그냥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황을 무척 곤란해 하고 피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순서가 꾸지람은 아니더라도 뭔가 내가 나쁜 아이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작이 치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으로 변해갔을거다. 컴플렉스로 인한 위축감, 자신 없음 등등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금 나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원인은 가난이다. 가난을 감추기는 어렵다. 아니, 감출 수 없다. 주름, 피부상태, 치열, 옷차림에 대한 감각,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자신감, 말투 등등. 가난은 나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도 한다. 가난은 선택의 수를 줄인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최선이 아닌걸 알면서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왜 그랬어~ 하고 물어볼 내용이 아닌거다. 최선이 아닌 차선, 주어진 선택에서의 최선을 선택하다 보면 점점 좋지 않은 결과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무시할 만큼 작은 각도가 거리가 길어 질 수록, 시간이 흐를 수록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지는 것 처럼 가난은 '그래도 괜찮을 만큼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하게 하고 그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이 결국에는 더이상 못쓰는 것이 되는거다. 지금이 그런 시점인것 같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 보다 지금이라도 수정할 수 있다는게,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출발이 늦었지만, 늦은 만큼 천천히 즐기면서, 노련하게 물 웅덩이를 피해가듯 사뿐사뿐 나아갈 수 있을거다. 실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사내가 거울 속에서도 어색한 기합을 지르며 땀을 흘리고, 아이는 키 만한 목검을 휘두르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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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5. 11. 28. 11:31

노푸로그램~ by 92005. 11. 28. 11:31



뭐 문제 있어?
그거 괜찮아?
어떻게 할거야???

등등의 질문에 대답한다.

노오 푸로그래엠~

이거 은근히... 중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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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
2005. 9. 25. 06:08

송 아저씨와 문신 by 92005. 9. 25. 06:08

경비원 송 아저씨는 왕십리에서 한가닥했던 주먹 출신이다. 그의 팔에는 과거를 기억하듯 문신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무늬를 하고 있지만, 그의 과거와 연관지어 "문신" 이라는 별명은 적절해 보인다.

한때 많은 젊은이를 수하에 둔, 큰 조직을 거느렸던 아저씨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일이 많은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짱가처럼 회사 주변 일들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지금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발음도 부정확해서 송 아저씨의 문장을 끝까지 듣는 것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젊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송 아저씨가 나타나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송 아저씨는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전에 문장을 마치려고 말이 빨라지지만 그 문장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송 아저씨, 서운한 내색은 하지 않는다.

숙직을 서던 날 밤, 숙직실이 답답하여 경비실 앞 로비에 앉았다. 맥주 한잔을 권했지만, 송 아저씨는 술 끊은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예전 성질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마시지 않기로 했다고. 야식을 먹으며 시작된 송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에 늦여름 숙직실의 밤이 깊었다. 사모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여쭤본 것 외에 나는 그저 장단만 맞춰 주었을 뿐이다.

액션영화가 어울릴 것 같은 주먹 세계의 이야기가, 의리 깊은 사나이가 등장하는 신파극이,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가족 간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건달 세계로 입문하게 된 이야기, 실미도를 떠올리게 하는 북파간첩 활동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 검찰과 정치인들과 건달이 서로 얽혀있는 이야기, 건달세계를 떠나게 된 과정의 이야기, 버스회사와 택시 회사 이야기, 시골에 내려가 가족들의 부채를 주먹으로 해결한 이야기 등등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조성모풍의 뮤직비디오를 연상할 만큼 절절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내가 어수룩해 보이고 그러지? 그래도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누가 뭐라 그래도 내 뜻대로 하는 사람이야. 나는 아닌거 맞다고 하는 사람이 젤 싫어. 그런 경우는 내가 못 참지. 남자는, 자기 소신이 있어야 되. 소신대로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하고." 이런 말을 할 때, 아저씨의 크고 두툼한 손은 단단한 주먹으로 꽉 쥐어졌고 눈빛은 젊은이의 것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송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몇 부분이 되풀이되기도 하고, 졸음 속에 묻혀 사라지기도 했다. 아저씨는 한편한편을 이야기 하면서 내가 들었던 부분 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기억 속에 멀리 잊혀져있다 떠오른 사람들을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 속의 그들이 나는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아저씨의 어눌한 표정과 끝이 흐린 말투 때문에 그의 인생이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단지 잔소리가 많은 아저씨로 분류되기에는 그가 겪어낸 인생이 너무 무겁다. 언뜻 언뜻 이야기 속에 드러난 송 아저씨의 눈빛은 평소의 것과 분명 달랐다. 영화처럼 멋진 결말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바랬다. 송 아저씨는 이야기의 끝에 남자로써 멋있게 살아갈 좋은 충고를 들려주었지만, 충고가 이야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양이 많아지는 바람에, 뭔가 있기는 한데 뭐가 뭔지 모르는 그의 문신처럼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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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1. 17:40

안부인사 by 92005. 8. 1. 17:40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안부전화를 드렸다.
나는 안부인사가 어색해서 웬만해선 하고 싶지 않다.
어디 안부인사 뿐인가.
축하의 말, 위로의 말도 어색하고 뻘쭘하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오늘 꼭 2군데 안부전화를 드리겠다고 어제 밤에 계획을 세웠다. 꼭 하자!
오전 회의가 끝나면서 "전화를 해야한다!!"와 "다음에 하지..." 갈등이 크다.
그러다가 시작된 통화중 1군데는 워낙 달변인 분이시라 "네~ 네~"만 했는데도 10분이 넘는 통화를 했다.
나머지 한군데는 평소에 그리 무뚝뚝한 분은 아닌데 오늘은 좀 무뚝뚝하게 받으신다.
통화를 끊으면서 내가 비굴(?)모드로 통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습하면서 더운 날씨 만큼이나 찝찌름한 기분.

며칠 전에는 후배 전화가 왔다.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는데, 평소에는 연락도 없다가 도움 청할 일이 있을때만 전화며 미안하다 말한다.
나도 거의 그런 입장이라 적어도 우리끼리는 그런 미안함 갖지 말자고 했다.
필요할때만 연락해서 인사드리는 그런... 내 모습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별 할말도 없으면서 연락하는게 좀 어색한거다.
그런 안부전화가 필요하다는거 알지만 잘 못하는거...
역시 "아는데" 병 중 하나.

부산집에 안부 전화를 드리면 꼭 "고맙다"라고 말씀하신다.
왜 고마운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끔씩 별 뜻 없이 연락하는 사람들이 나도 고마웠다.
나는 왜 고마웠더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반갑고 고맙고 그랬던 것 같다.

안부인사...
어렵고 뻘쭘하고 때로는 비굴하게 까지 느껴지기도 하지만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사근사근, 조근조근 친근하게 대하는거, 살갑다라고 말하는거... 난 좀 어렵더라.
내가 훈련이 덜 되어서 그런거겠지.
그렇지만 나도 자연스럽게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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