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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9. 11. 04:04

비정상 컨디션 사소한 일상2004. 9. 11. 04:04

구토. 광화문 버스 정류장에서 뿜어나오는 구토를 길거리에 쏟아내고 말았다. 오후 3시 30분을 좀 넘긴 시간이었을 거다. 쪽팔렸다. 고개를 들지도 못할 만큼 부끄러웠다. 흙바닥에 사방으로 튀기지 않고 쏟아낸 한덩어리. 그나마 다행이라 할만하게 구토를 한 곳은 공사장 근처였다. 다시 생각하기도 아찔하다. 밤 늦은 시간도, 이른 새벽도 아닌 오후 시간에 술취한 사람 처럼, 결코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못할 모습이었다. 술로 막힌 위장에서 올라온 것들은 술이었다.

가방에는 휴지가 없었다. 가방이 아닌 곳에서 갑자기 휴지가 나올리도 없고해서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손목으로 입주변을 닦았다. 처음에 입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입 근처 뿐만 아니라 얼굴의 반 정도는 번들거렸던 것 같다. 닦아도 닦아도 다 닦일 것 같지 않던 얼굴을 닦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부끄러웠고 그럴리 없지만 누군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길 바랬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 모습은 촛점이 없이 흐렸고 슬로우 모션처럼 장면이 느렸다.

이미 늦어버린 약속이 아니었다면 내일로 미뤘을 외출이었다. 늦잠 때문에 늦은 주제에 몸이 좋지 않아서 나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에는 변명의 패턴이 너무 뻔해보였다. 어찌됐건 약속은 지켜야 했고, 그래서 나선 외출이었다. 약속시간은 처음 약속보다 2시간 미뤄졌다.

번들거리는 얼굴을 대충 닦았다는 생각을 할 때쯤 면세백화점 입구가 가깝게 보였다. 번들거리는 부분을 가리기 위해 팔끔치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건물 로비에는 은행이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비실인듯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전화벨이 울렸지만 전화를 받을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내렸고 건물로비는 붐볐다. 모두 나만 쳐다볼 것 같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화장실은 로비를 두어번 돌고 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에 잠이 깼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몸이 피곤했다. "술이 너무 취했군" 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좀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정도라고 생각했다. 막판에 남은 술 처리하느라 홀짝 홀짝 마신게 많지 않았나 싶다. 외출 전에 어제 외출하느라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해야 했고, 오늘의 약속 시간을 지켜야 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1000번 버스가 서지 않는 정류장에서 10분 가까이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고, 정작 버스가 왔을 때는 버스카드가 안 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다시 챙겨 나와야 했다. 구토의 조짐은 이때 보였다. 버스 카드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화장실에서 속엣 것을 몇번 올려냈다. 다 꺼냈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왔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버스에서는 머리가 아팠다. 버스를 타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의자에 기대기도 하고 창에 기대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머리를 똑바로 들고 간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도중에 몇번은 차에서 내려 좀 쉬었다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고 있었고, 차에서 내린다고 해서 뭔가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광화문에 거의 다 왔을 때,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 신호에 걸렸을 때, 구토의 조짐이 있었다. 참아 보자고, 조금만 더 참자고 다짐을 하고 심호흡을 하고 내 몸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두어 걸음을 떼던 순간 그 일이 터진 것이다.

면세점 건물 화장실은 생각보다 작고 좁았다. 세수를 하고 입을 헹궜다.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사지에서 살아나온 사람처럼 정상의 눈이라고 할 수 없는 눈동자.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을텐데 부끄러워서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망설였다.

건물 밖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들어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바람. 막혔던 것이 풀려서 일까 두통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잠깐 앉아 쉬고 싶었다. 그때, 지금 어디쯤 왔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 할 수 없었다. 모데라토. 빨리 걷지는 못해도 발걸음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는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바닥에 닿는 느낌이 그려질 정도로 온 신경이 걷는데 집중되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쉼호흡을 한번 하자 두통이 사라진다. 목소리가 돌아왔고 기울어져 숙이고 있던 머리가 제 위치를 찾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들이 이 포스트를 보기전까지는 술 때문에 늦잠을 잔것도, 구토를 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한테 불리한 증거물 스스로 남겨 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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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