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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28. 02:01

그녀는 설거지하지 않는다 by 92003. 12. 28. 02:01

이 여자... 너무 한거 아냐?
요즘들어 신경쓸 일이 많아 피곤하다고 툴툴거리더니 오늘,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녀는 밥을 차려 달라고 말했다.
집안 일은 자기 집에서 질릴 정도로 하고 있으니, 내 집에서 만큼은 집안 일 하기 싫다고.

어... 나도 마감 기간이라 바쁜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 앞에서 자연스레 나온 말은
"어디 실력발휘 한번 해볼까" 였다.

노련한 자취생의 빈티카레(빈티지? 아니, 빈곤한 빈티)를 만드는 동안 그녀는 잠이 들어 버렸다.

이 여자 뭐냐...
나는 내가 바쁠때면 밥도 좀 챙겨주는... 그런 우렁각시를 바랬는데
이건 뭐... 마님 모시고 탈출한 마당쇠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마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 자는 사람에게 자장가 부르는건... 그만 일어나라고 깨우는거라고...
- 특히 내가 부르는 자장가는... 자는 사람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그녀는 일어나다 말고 내 다리를 베개삼아 다시 눕는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단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든 얼굴을 들여다 본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웨이브진 잔머리,
눈꺼풀과 속눈썹, 눈에서 코로 이어지는 경계의 곡선, 얼굴의 솜털, 도톰한 입술...
다리를 베고 안쪽으로 누워 있어 뽀뽀도 못하겠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내가 가진 불만은 온데간데 없고, 그녀와의 좋은 기억만 생각난다.
남 모르게 커피를 주고 받던 눈길, 처음 손 잡던 날의 짜릿하고도 애매했던 기억,
졸업식 전날 그녀가 흘렸던 눈물, 첫키스 ...

빈티 카레가 식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에 놀라기도 했고,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이렇게 행복해 하고 있는 내가 참 바보같다는 생각도 했다.
가만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이렇게 가끔, 어리광 부리는 것으로 그녀는 그녀에게 맡겨진 짐을 잠시 내려 놓는다.
그녀의 편안한 얼굴을 본다.

그녀는 내 앞에서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어떤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요구에 거절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내게 그녀는 참...
여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손가락으로 코딱지를 파내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웃는다.

가벼운 키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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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