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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8. 31. 20:32

2kStory: 그녀는 이뻤다 by 92004. 8. 31. 20:32

후덥지근한 열기에 눈을 떴다. 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공터였다. 학교 건물의 뒤편 주차장.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다. 아침햇살에 차 안은 끈끈하고 더웠다.

그녀와 나는 집 방향이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내려주겠다는 그녀의 차를 탔다. 이미 날이 밝아온 시간이라 대리운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술도 깨야 했지만 졸음 때문에 그녀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 였을거다. 잠들기 전, 그녀와 나는 술자리에서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 이야기에서 연기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고 연애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아마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을 거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질투에 관한 이야기나 그 해석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 했던것 같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풀이 술자리였다. 1차에서, 2차에서 그녀와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1차에서는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2차 술자리가 마칠때쯤 잠깐 이야기를 했었나, 그것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3차에서는 사람이 많이 줄었고, 음악이 크고 어두운 곳이라 술자리는 무척 시끄럽게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키스를 하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귓속말을 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야기였을거다. 다음날 오후에 만나 계속 얘기 듣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 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생긴 공감 때문이었는지, 술기운이었는지 술자리를 마칠 때 쯤, 그녀와 나는 친해져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이야기를 한다. 눈이 마주친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가 참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크고, 속눈썹이 길었다. 오똑한 코나 코 끝의 각도도 보기에 좋았다.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선 위에는 하얀 솜털이 있었다.

그녀의 목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피부에 대해, 머리스타일에 대해, 화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것 같다. 언제부턴가 내 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녀는 옆으로 누워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고 나는 머리 쓰다듬기를 멈추었다. 키스하기에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정해진 코스를 밟듯 습관적인 행동을 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편하게 누워 좀 자요. 있다가 깨워 줄께요."

나는 다짐하듯 '방향이 같은 일행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자. 말자. 말자... 창문을 활짝 열고 그녀를 쳐다보니 벌써 잠이든 것 같다. 그녀의 입술이 클로즈업 되어 다가오는 것 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며칠 전, 그녀를 보면서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면...' 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면 이런 이런 점을 말해 줄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녀에게 그녀에 관한 조언을 한다거나 충고를 하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그녀는 열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전투적이기 까지 했는데 남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길 바랬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에 잔소리를 하고 싶었던거다.

나는 그녀가 에너지 과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열정은 내게 오기로 보일 때가 많았고, 성실함은 내게 미련함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가진 밝고 활기찬 모습은 자신을 드러내는 과도한 행동으로 보였다. 내 눈에 그녀는 한마디로 우아하지 않았다. 내게 그녀는 단지 예쁜 여자일 뿐이었다. - 그렇지만, 그녀가 가진 다른 모든 단점을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뻐 보이기는 했다.

물론, 그녀에게 나는 그저 나이 많고, 소심한 한 아저씨로 보였을 것이다. 나이많고 소심하고, 배 불뚝이에(그녀는 나에게 "곰돌이 푸우 같아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는 아저씨로 보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나 역시 그녀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푸르스름 하던 하늘 색깔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출근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차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지나갔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폈다. 더위 때문인지 머리에 땀이 날듯 열이 있었다. 마시다 남은 음료수를 마셨다. 포도향이 달콤하게 입술을 적셨다.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전형적인 모습의 회사원 두명이 차 옆을 지나갔다.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금방 눈을 떴지만 잠이 완전히 깨지는 않았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나는 잠을 깨라고 머리 카락을 당겨주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이쁘다고 생각했다. 자다 깬 모습도 이뻤고, 잠든 모습도 이뻤다. 2~3일은 머리 감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다 일어난 머리는 기름기 없이 찰랑거렸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로 숙여졌다. 그녀의 이마가 내 목과 어깨 사이에 와 있었다. 잠깐 놀라기도 했지만, 나의 오른팔은 놀랍게도 그녀의 목을,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의 오른팔은 여자를 대할때면 마치 남의 팔처럼 내 마음과 다르게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팔이 내 허리를 잡았는지, 어깨를 잡았는지 정확하지 않다. 몇번의 키스를 하는 동안 몇번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는 그녀가 이뻤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이뻤고, 키스는 즐거웠지만 어색한 뭔가가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나는 그녀가 가진 욕심을 내게 유리하도록 이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성적인 욕구를 따르자면 그녀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 몸이 그녀를 요구한다고 해서, 또 가능성이 보인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척 연기하는 것은 옳지않다. 지금은 성적인 욕구에 이끌려 다닐 나이가 아니다. 연애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만들어낸 분위기였고 그 분위기에 휩쓸린 것 뿐이었을 거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와 잘 될 수도 있을거다'라고 생각도 잠깐 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많았다는 것과 내 생각과 다른 그녀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운전 하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피곤했는지 나에게 운전을 부탁했다.나는 운전면허증이 없으므로 운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곤해 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30여분 정도, 의례적인 인사와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대화 중간중간에 어색한 침묵이 끼어들면서 우리는 말이 점점 줄어져갔다. 시간이 갈 수록 뭔가 잘못되어 가고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녀의 입술을, 이마의 솜털을, 한 팔에 안기던 허리의 촉감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아, 저녁때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죠?"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어색할 것 같았고, 어제보다 친한척 연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키스 한번 했다고 갑자기 친한척 구는 것도 우스워 보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별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을 하느라 잔머리 굴리고 있을 내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시간이 흐를 수록 우리는 후회할 것이고, 결국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힘찬 에너지를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숙취가 남은 몸을 침대에 던져넣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 났을 때, 내 휴대폰에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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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어가셨어요?

제가갑자기급한일

이생겨서오늘못뵐

것같아요죄송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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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잘 들어갔냐고 안부인사도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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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름